사비궁(四沘宮)

 

우리나라 삼국시대 중 왕궁의 모습을 최초로 재현한 사비궁은 백제문화의 절정을 이룬 사비시대의 왕궁으로 궁궐의 기본배치형식 중 중앙부분인 치조(治朝)의 권역을 재현하였으며 건축양식은 하양 주심포양식으로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백제의 대표적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1994년부터 2010년 까지의 총 17년간의 역사적인 대장정 끝에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함정리 일원 3,276천에 6,904억원을 투자하여 백제왕궁인 사비궁과 대표적 사찰인 능사, 계층별 주거문화를 보여주는 생활문화마을 , 개국 초기 궁성인 위래성, 묘제를 보여주고 있다. 고분공원, 충청도민의 기증으로 조성된 백제숲,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백제역사문화관 등 1,400년 전 문화대국이었던 백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양문을 들어서면 사비궁의 전경이 보이고 우측으로 능사가 보인다.

 

궁궐의 가장 중심 공간인 정전의 출입문으로 천정전의 남문을 뜻하여 천정문이라 하였다.

 

 

 

 

 

 

 

 

 

 

 

국가의 큰 정사를 하늘에 고하여 결정한 정사암에서 유래한 천정대에서 이름을 따왔다. 천정전은 사비궁의 가장 중심공간으로 왕의 즉위 의례 신년행사를 비롯한 각종 국가의식이 거행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등 왕궁 내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대례복

 

옥좌

 

대신들과 정사를 논하던 회의장  ↑↓

 

 

 

 

 

 

 

다섯가지 색을 사용한 단청  ↑↓

백제 시대 부여의 궁성.

 

사비성은 백제 때 도읍 자체의 명칭이기도 한다. 백제 때에는 부여 일대의 평야를 사비원(泗沘原)이라 하고, 금강을 사비하(泗沘河)라고도 하였다. 백제가 협소한 웅진(熊津)을 버리고 넓은 들이 있는 곳에 보다 큰 도읍을 건설하기 위해 천도한 것은 538년(성왕 16) 봄이다. 무왕은 수도의 건설을 위하여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공장(工匠)ㆍ화사(畫師) 등을 청하였다. 사비성은 이때 새로 쌓은 것이 아니고 수축만 하였다.

 

이 성은 부소산을 감싸고 있고 양쪽 머리가 낮게 둘러져 백마강을 향해 초승달의 형태를 보이고 있어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성터의 길이가 13,000여척이나 되며, 치소가 성 안에 있었다고 한다.

백제가 망한 뒤 백제의 유민들이 모여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664년(문무왕 4)에는 한때 사비성을 점령하여 신라군을 물리치기까지 했다. 당나라가 사비성을 점령한 뒤 이곳에 동명주도독부(東明州都督府)를 설치하였으며, 웅진ㆍ노신(鹵辛)ㆍ구지(久遲)ㆍ부림(富林)의 4개 현을 예속시켰다.

 

신라가 이곳을 차지한 뒤 사비주(泗沘州, 또는 所夫里州)를 설치하였고(문무왕 11), 신문왕 때 군으로 바꾸었다. 경덕왕 때 부여군(扶餘郡)으로 바꾸어 웅주(熊州: 지금의 공주시) 관할하에 두었고, 석산(石山)ㆍ열성(悅城)의 두 현을 예속시켰다. 부여의 명칭은 성왕이 이곳으로 천도할 때 남부여(南扶餘)라고 한 데서 유래된다. 고려 이후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사비의 지명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소부리(所夫里)가 ‘’로 서야벌(徐耶伐)과 같은 뜻의 ‘동경(東京)’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설과, 사비(泗沘)가 소(所)와 같은 어형이고 부리(夫里)가 읍(邑)을 뜻하는 것으로 ‘수읍(首邑)’의 의미를 갖는다는 설이 있다. 지리적 위치로 볼 때 부여가 동경이 되기는 어려우므로 후자의 설이 타당한 것으로 본다.

 

백제문화단지 (2012.7.24  맑음)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

 

 실내조명이 어두워 사진이 흐릿하다. ↑↓

 

 퍼온 사진  

 

7세기 초 백제의 금동향로.

 

전체높이 64cm, 지름 20cm이다. 1993년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출토되었으며 당시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 또는 부여 능산리 출토 백제금동대향로라고 불렀으나 문화제청에서 백제금동대향로()로 등록하면서 정식명칭이 되었다.

 
봉황뚜껑장식, 봉래산이 양각된 뚜껑, 연꽃잎으로 장식된 몸통, 용받침의 4개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뚜껑의 꼭지 위에 있는 봉황은 꽁지를 쳐들고 날개를 활짝 펴고 있으며, 그 밑으로는 5인의 악사()가 둘러 있고, 다시 아래로는 74개의 산이 중첩되어 있다. 몸통에는 우아하고 정교한 연꽃 무늬가 새겨 있으며, 한 마리의 용이 입을 그릇바닥 중심에 붙이고 몸을 틀어내려서 받침을 이루고 있다. 이는 중국 한()나라 때부터 만들어진 박산향로()의 형식을 계승한 것이다. 

 

박산향로는 대개 바다를 상징한다는 승반() 위에 한 개의 다리를 가지고, 그 위에 중첩된 산봉우리가 있는 동체를 가진 향로로서 신선사상이 조형적 배경이 되었다 한다. 따라서 이 향로에도 신선사상이 짙게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등장하는 인물들은 신선으로, 그리고 동물들도 현실세계의 동물이라기보다는 신비의 이상향에 살고 있다는 상상의 동물들로 볼 수 있다.

 

또한 몸통이 연꽃봉오리 모양인 데서 연화화생()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연화화생은 극락세계의 연꽃에서 만물이 신비롭게 탄생된다는 불교의 생성관으로, 이 향로에서의 연꽃도 뚜껑의 산을 탄생시키고 있다. 이는 74개의 산의 능선 테두리마다 가해진 빗금 모양의 화염무늬에서 알 수 있다. 화염무늬는 불교의 연화화생의 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연화화생관은 용과 연꽃의 관계에서도 이루어진다. 즉, 이 향로에서 용은 바다의 상서로운 짐승으로서 음()의 세계를 나타내는 것 이외에 불교적인 관념을 담고 있다. 용이 토해내는 기를 불교의 연화화생의 기로서 해석하여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용의 입에서 토해진 기는 연꽃으로 토해져 이 향로의 몸통으로 화생되는 것이다.

 

이 향로의 또 다른 조형적인 배경은 음양설이다. 음에 해당하는 아래로부터 수중동물의 정화()로 용을 등장시키고, 그 위로 연꽃 위에 생성된 지상의 선계()를 나타냈다. 그곳에는 다양한 동물과 악사를 비롯한 신선이 배치되고, 정상에는 봉황을 배치하였는데 봉황은 곧 양의 정수가 된다. 그리고 수중생물뿐만 아니라 지상의 신선과 동물 등이 혼재되어 있는 몸통은 향로에서 그 높이가 중간 부위이듯 음과 양이 어우러지는 중간 선계 지대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 5명의 악사선인과 5개의 향연 구멍을 두겹으로 낸 것 등은 음양설과 결합되어 나타난 오행설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이 향로의 꼭대기에서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봉황은 예로부터 음악과 춤을 동반한다고 하며,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바로 밑에서 5마리의 원앙이 봉황을 바라보고 있으며 선계의 악사들도 봉황을 맞아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산중의 신선들은 음악과 함께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낚시하며 머리를 감기도 하고, 말을 타고 수렵을 즐기기도 한다. 이 밖에도 이 향로에는 6군데의 나무와 12군데의 바위, 산중턱을 가르며 난 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입체적으로 돌출되어 낙하하는 폭포, 낚시터가 된 잔잔한 호수 등을 볼 수 있다.

 

향로의 대좌를 용으로 삼은 예는 중국의 한대부터 나타나지만, 당시는 용의 표현이 미약하고 연화화생의 표현도 없던 시기이다. 향로의 몸통을 연꽃모양으로 구성한 형태는 중국의 남북조 시대인 400년 경부터 등장하고 있으나 이 향로같이 고도로 고안된 연화화생의 표현이나 봉래산에서 전개되는 다양한 인물, 동물 등의 묘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이 향로는 중국향로의 형식을 따랐으나 조형성이나 회화적인 구도는 중국을 뛰어넘는 예술적 감각과 독창성을 발휘한 대표적인 백제 미술품이다. <Naver백과>

 

국립부여박물관 (2012.7.24  맑음)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Tutankhamum His tomb and his treasures)-(2/2)

 

받침대가 있는 이중 화병-두 개의 연고 단지가 작은 탁자처럼 생긴 받침대에 붙어 있다. 앞쪽 단지에는 투탕카멘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옆에는 파피루스와 백합 줄기가 그려져 있다.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상ㅈ;ㅇ히는 두 식물의 얽힘ㅇ른 '두 땅의 통일'을 의미한다. 이 단지는 나일 강 홍수의 신신 하피가 떠받들고 있다. 하피 신상 또한 단지 역할을 했는데, 머리에 연꽃을 꽂고 있다. 신의 흔들리는  가슴과 풍만한 몸집은 풍요한 비옥을 가져다 주는 신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이 단지 또한 무덤이 약탈됐을 때 깨져 있었고 안에 있던 귀중품도 도난을 당한 상태였다. ↓

 

 

 투탕카멘의 마차 ↓

 

 장품, 연고 보관용 돌그릇 ↓

 

 

 투탕카멘의 관은 총4개로 외관과 3종의 내관으로 되어 있다. ↓

 

동물 모양의 옷깃-카멘의 미이라에서 수많은 보석이 발견됐는데 몇몇 깃은 얇은 금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금박이 너무 약해서 일상생활에서 쓰일 수는 없었을 것이고 아마도 매장용으로 특별히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뱀 옷깃은 하이집트의 수호신인 와제트 여신을 나타내는데, 여신의 머리에는 왕관 장식이 있고 두건에는 상이집트의 전령 동물이 나타나 있다. 동물 모양을 한 신의 형상처럼, 뱀은 왕을 보호하기 위해 날개를 펼치고 있다. 독수리 여신의 반대는 하이집트의 뱀 여신인 와제트로서 북부 지역을 대표한다, ↓

 

 

 

 

 

 

 금으로 된 속관-무게가 110.4kg이나 나가는 가장 안쪽에 있는 순금속관은 무덤에서 나온 유물중 가장 멋진 보물이다. 이 관은 미라 형태의 왕을 나타내고 있는데, 깃털 옷을 입고 신을 상징하는 턱수염을 하고 있으며, 양쪽 팔에 왕홀을 쥐고 두건을 썼다. 황금 마스크와 마찬 가지로 이 관의 얼굴 표정은 공식적이고 이상적인 왕의 초상을 보여준다. 불행하게도 짙은 라인의 눈 주변 상감 세공은 관에 제의용 향유를 뿌리는 바람에 지워져 버렸다. 깃털 무늬와 표면의 새김글은, 다리 부분의 여신 이시스와 네프티스의 정교한 부조처럼 두꺼운 순금 판을 끌로 새긴 것이다. 이는 원래 새 모습을 한 여신들을 그린 것이었는데, 나중에 끌로 새긴것에 호화롭게 삼감세공한 것이다. ↑↓ 

 

 

 

투탕카멘의 황금가면-무게가 11kg인 이 마스크는 미라의 머리 위에 씌워져 있었다. 이 마스크를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보물 중 최고로 꼽는 사람도들이 많다. 소년 왕을 실제와 비슷하게 이상적인 모습으로 묘사한 이 황금 마스크는 후기 아마르나 시대의 예술양식으로 제작됐는데, 그 우아함은 어느 유물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 살아 있는 듯 한 눈에는 석영을, 눈동자에는 흑요석을 상감해 넣었다. 줄무늬의 두건 앞 이마에는 신성한 상징 2개가 달려 있는데, 상이집트의 독수리 머리와 하이집트의 뱀의 몸통이다. 크기가 서로 다른 양쪽 귀에는 귀고리를 하기 위해 귓볼을 뚫었다. 마스크는 얼굴을 덮었을 뿐 아니라 매 머리 모양으로 끝을 처리한 둥근 옷깃이 있는 가슴 부위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마스크의 뒤쪽에 새겨진 문자는 감각기관을 신과 동등하게 취급한다는 내용과 함께, 마스크를 씌우는 동안 장례 의식의 일부로 암송됐을 범한 내용이 적혀 있다. ↓

 

 

 

  

 

 

 투탕카멘의 관(외관) ↓

 

 

 

 투탕카멘의 가보-투탕카멘 아기의 관 외에 보물의 방에 있는 세번째 관은 송진 코팅을 한 바깥 관과 나무에 금박을 입힌 속관으로 구성되었는데, 아마포 뭉치와 소형 관이 들어있었다. 아마포를 풀었을 때 사슬과 함계 웅크린 왕의 황금 조각상이 드러났다. 소형 관에는 더 작은 모형 관이 들어 있었는데 미라처럼 싸여서 투탕카멘의 할머니인 티이여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관에는 땋은 머리카락 타래가 들어있었는데 이는 할머니의 유품으로 보인다. ↓

 

 

은 부조형 사당-상이집트의 예배당 형태를 띤 이 사당의 뒤쪽 기둥에는 속이 빈 받침대가 있는데, 기둥 위의 푹 꺼진 발자국은 아마도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듯 하다. 왕을 돌보는 뱀 형상의 여신인 '마법' 부적오 발견됐다. 이사당이 그려진 18개 장면은 왕비가 왕을 위해 여러 행동을 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오른 쪽 장면에서왕비는 새 사냥을 돕고 있고, 왼쪽에서는 왕에게 타악기와 물을 건네주거나 왕의 목 둘레에 꽃무늬 옷깃을 둘러주고 있다.  다른 장면에서 왕은 아내의

손에 액체를 따르고 있다. 뒤쪽 장면은 왕비가 남편에게 향유를 발라주며 왕에게 영원한 통치의 상징으로 야자수 줄기를 건네주고 있다.  이 장면들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부부 사이의 여러 모습들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왕비의 행동은 종교 예식에서 사제의 행동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 문의 날개에 그려진 왕비는 왕에게 숭배의 상징물과 꽃다발을 주고 있다. 투탕카멘이 이미 내세에서 신의 위상을 가지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새 사냥 또한 내세에서 적을 무찌르는 것을 상징한다고 ㅙ석할 수 있다. ↓

 

 

 발가락과 손가락 골무-투탕카멘의 손가락과 발가락은 모두 각각 얇고 고운 면 조각으로 싸여 있고 금박으로 만든 골무 속에 들어 있었다. 공들인 흔적이 보이는 발가락과 손가락 골무는 손톱, 각질층과 관절 위의 주름을 보여 준다. 황금 골무는 각각 손가락과 발가락을 측정해서 만들어졌는데 죽은 왕의 말단 부위를 특별히 보호하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황금은 '신들의 몸'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금 재료는 죽은 파라오의 새로운 위상을 보여 준다. ↓

 

 

 신상들 ↑↓

 

 우샤브티(Shabtis)-왕을 의한 내세의 하인들 ↓

국립과천과학관 (2011.12.23 맑음)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Tutankhamum His tomb and his treasures)-(1/2)

 

1. 투탕카멘

 

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제12대 왕(재위 BC 1361∼BC 1352)으로 18세에 요절하여 알려진 것이 없었으나 '왕가의 계곡'에 있는 왕묘가 발굴되면서 유명해졌다. 정확하게는 투트 앙크 아멘이라 한다. 제10대 왕 이크나톤(아멘헤테프 4세)의 아우 또는 조카라고도 하는데, 출생에 관해서는 확실하지가 않다. 제11대 세멘크카라는 만년에 이크나톤과 공통통치를 펼쳤으나 재위 3년 만에 죽었기 때문에 9세에 즉위하였다. 왕비는 이크나톤과 네페르티티의 제3왕녀인 안케센아멘이다.

왕은 처음에는 아텐 신앙을 나타내는 투트 앙크 아텐으로 칭하였으나, 즉위 4년째 아멘 신앙을 나타내는 투트 앙크 아멘으로 개칭하고 수도를 아마르나에서 테베로 옮겼다. 연소한 투탕카멘
이 당시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중신 아이와 노장 할렘헤브(모두 후에 국왕)의 보좌에 힘입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투탕카멘은 BC 1361년 9세의 나이로 이집트의 파라오에 등극, 18세에 사망할 때까지 9년간 재위했으며그러나 18세의 젊은 나이에 죽은 왕의 죽음에 대한 의혹은 풀리지 않고 있었으며, 업적에 관한 기록도 남겨지지 않아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1922년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에 의해 룩소르 부근 나일강 서안의 '왕들의 계곡'에서 발견됐다. 투탕카멘 무덤은 도굴되지 않은 유일한 이집트 왕릉으로 3300년만에 완전한 상태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2. 누가 발견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 1874.5.9~1939.3.2)는 영국의 고고학자이며 이집트 투탕카멘의 묘를 발굴하였다. 워드 카터는 1874년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캥신턴에서 태어났다. 그는 17살에 대영박물관에서 고고학을 배운 후 당시 최고의 고고학자였던 윌리엄 피트리에게 고고학을 배운 뒤 이후 이집트 고고국의 국장인 가스통 마스페로의 후원으로 1901년부터 왕가의 계곡에서 투트모세 4세 · 아멘호테프 1세 등의 묘를 발견했다.

그 후, 조지 하버드 카너본 경의 후원으로 1922년 11월 4일에 고대 이집트의 왕 투탕카멘의 왕묘를 발견하였다. 흔히 투탕카멘 묘를 발굴할 때의 파라오의 저주가 유명한데, 이 중 하워드 카터가 키우던 애완새 카나리가 코브라에게 잡혀먹혔으므로 몇몇 발굴 인부들은 발굴작업에 불길한 징조라고 두려워 하였다. 왜냐하면 코브라는 이집트 왕의 머리를 장식하는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23년에 그의 발굴을 후원하던 조지 하버트 카너본 경이 사망하자 투탕카멘의 저주를 받아 사망하였다는 소문이 펴졌다. 그러나 1933년 나치 독일의 고고학자인 슈타인도로프는 발굴 작업이 진행되던 중에 죽은 21명의 죽음을 일일이 조사하여,나이가 들어 죽었거나 발굴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의 죽음, 또는 우연한 죽음이었다고 진상을 밝혔다. 파라오의 관에 일반적으로 '사자의 안녕을 방해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라'라는 문구가 쓰여진 것이 사실이나,투탕카멘의 관에는 이와 정반대로 '왕의 이름을 알리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라는 말이 쓰여 있다.

 

그 후 6년에 걸쳐 발굴 작업이 계속진행되었고 이집트학에 풍부하고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하워드 카터는 투탕카멘 왕묘의 발굴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발굴작업을 하지 않았으며 1932년 영국으로 돌아갔다. 1939년 3월 2일 65세의 나이로 죽었다..

3. 발굴상태

 

1922년 카터(Howard Carter, 1873~1939)에 의해서 발견된 왕묘는 짧은 계단과 통랑이 전실, 부속실, 현실, 보고의 4실로 통하는 이례적인 소형의 것으로, 벽화도 현실(玄室)에만 있다. 4겹으로 된 대형 황금칠의 목관, 석관, 3겹의 인형관에 안치된 황금 마스크를 쓴 왕의 미이라를 비롯해, 대량의 부장품은 거의 완전한 채로 남아 있어 도굴을 면한 <왕가의 계곡> 유일한 왕묘로서 당시의 파라오의 매장관습을 아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1703점의 출토품 중에는 왕의 부활에 필요한 내장을 넣은 카노포스 용기나 신상, 왕상 외에 현세와 마찬기지로 내세의 생활에 필요한 왕좌 • 침대 • 함 등의 가구나 그릇, 의류, 장신구, 무기, 수렵구, 전차 등이 포함되어, 당시의 호화로운 궁정생활과 높은 공예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현실에 그대로 남아 있는 석관, 미이라형 관, 미이라를 제외한 유품의 대부분은 이집트의 카이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집트 ‘왕가의 계곡’에 있는 투탕카멘 왕의 묘(제62호)에서 출토한 부장품의 총칭. 영국 귀족 카나본(Lord Herbert, 5th Earl of Carnarvon, 1866~1923)의 후원 아래 1922년 카터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현존하는 고대 이집트 유물 중 가장 호화롭고 종류가 많은 일괄유물로서 유명. 묘는 거의 도굴을 면하였으므로 당시 국왕의 매장 풍습을 연구하는데 매우 귀하다. 중요한 출토품은 왕의 미라를 넣은 황금제 및 목제 금칠한 3중관(棺), 3중관을 넣은 석관 및 그것을 넣은 4중의 감실상자, 미라의 얼굴을 덮은 황금 마스크, 내장을 담은 4개의 황금제 소형관, 귀중한 신상(분실)을 넣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금칠한 감실상자, 장례용 침대, 옥좌, 많은 부적, 황금 및 보석제의 각종 장신구, 그외에 전차, 무기, 대소의 상자를 비롯한 많은 생활용품 등이다. 아마르나 미술의 양식을 보존한 후(後) 아마르나 미술의 특징을 나타내며 당시의 궁정 공예수준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발굴 당시 투탕카멘의 무덤에선 110kg짜리 황금 관(棺)과 황금마스크(11kg) 등 호화찰란한 금은보화와 합금되지 않은 철, 3천여년동안 마르지 않은 향료 등 2천여점의 귀중한 유물이 나왔다.

 

4. 언제까지 전시

전세계 고고학계를 깜작 놀라게 한 바로 그 전시가 이집트 파라오 투탕카멘의 유물 천여점을 최첨단 기술로 복원, 파라오 무덤 발굴 당시 상태 그대로 재현, 투탕카멘 복원 유물 1,300여점, 전시장 규모 800평의 규모로 이집트에 가도 다 볼 수 없는 유물들을 한자리에서 현재까지 유럽 12개 도시 300만명 이상 관람한 찬란한 이집트 문명의 영적 세계로 떠나는 여행을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 것이다.

 

전시기간 : 2011년 10월 15일~2012년 2월 26일

전시장소 : 국립과천과학관 특별전시실(지하철 4호선 서울대공원역 5번출구)

관람시간 : 평일/주말 오전 9시 30분~오흐 6시 30분

휴 관 일 : 매주 월요일(사진찰영은 후레쉬없이 가능함)

 

5. 전시장

전시장 매표소 ↑↓

 

발굴당시의 4개의 방으로 구분하여 전시가 되고 있다. ↓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는데 기여를 한 로제타스톤 ↓

 

투탕카멘석상 ↑↓

 

별실의 부장품 ↑↓

 

보물의 방 유물 ↓

 

 

전실에서 유물을 발굴한 후, 하워드 카터와 카나번경은 1923년 2월 17일 현실을 열었다. 이 방은 하나의 커다란 금박 사당이 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당의 덮개를 열자 내부에는 사당이 3개가 더 들어있었다. 4번째인 가장 안쪽의 사당 안에서 발굴자들은 무거운 석관을 발견하였는데, 그 안에 3개의 관이 있었다. 석관과 관을 열기 위해 사당을 먼저 해체하고 치우는데만 몇 달이 걸렸으며, 비좁은 공간에서의 작업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서관 내부에서 카터는 마침내 미라 형태의 관 3개를 발견했으며 이들 관 내부에도 하나씩 더 겹쳐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장 안쪽의 관은 110k의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안에는 머리에 황금 마스크를 쓴 투탕카멘 왕의 미라가 들어 있었다.

 

바깥쪽 함과 묘실 벽 사이의 좁은 통로에도 많은 물건이 놓여 있는데, 왕이 하늘을 가로질러 항해할 때 쓰는 노(오른쪽)도 있다. 나머지 것들은 개봉된 사당 안에 있던 기름 렘프 등을 포함하여 이집트인의 일상 생활용품들이다. 램프는 연못에서 떠다니는 연꼿의 꽃보옹리와 잎으로 표현되어 있다. ↓ 

 

 

 

 

 

 

 

 

 

미이라의 내장을 보관한 용기 ↓

퍼온사진 ↓ 

 

카나프스 사당-카나프스 사당은 미라의 내장을 보관하는 카나프스를 담아두는 궤짝이다. 궤짝 4면에는 장기를 몸으로 지키는 4명의 여신이 둘러서 있다. ↓

 

사후세계에서 왕을 대신하여 일할 하인들 ↓

 

왕은 조그만 파피루스 보트에 서서, 발 하나를 앞에 두고 작살을 던지는 행동을 취하고 있다. 사냥감이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호루스 신화에서 세트신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하마일 것이다. 조각상이 나온 사당에서는 이것과 한 쌍이되는 다른 조각상도 발견됐다. 다른 한쌍의 조각상은 아마도 국가 예식에서 호루스 신의 역할을 하는 왕의 모습을 나타냈을 것이다.↓

 

세 개의 왕의 조각상은 각각 한 손에 도리깨 홀을 쥐고 있으며 받침대에는 왕의 이름인 투탕카멘이 새겨져 있다. 각각  이집트의 남부와 북부 왕관을 쓴 두 조각상이 왼손에 기다란 갈고리 창 홀을 쥐고 있는 모습은이들이 한 쌍을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얼굴이 투탕카멘과 닮지 않고 아르마나 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특별히 투탕카멘의 장례를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장례식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다.

 

곧은 지팡이를 잡고 하 이집트의 왕관을 쓰고 있는 세 번째 조각상은 어린 시절 투탕카멘의 얼굴과 비슷하다. 그러나 상이집트를 대표하는 조각상 중 이 같은 조각상은 결코 발견된 적이 없다. ↓

 

 

 

검은 표범을 탄 왕의 조각상은 왼손에 긴 지팡이홀을, 오른 손에는 도리깨를 쥐고 있다. 표범은 자신의 몸에 죽은 왕을 받아들이는 고대 하늘의 여신을 형상화 하고 있다. 이 조각상과 쌍을 이루는 조각상은 전통적 양식이 아닌 아마르나 시대의 변형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이것은 조각상이 투탕카멘이 죽은 후 장례를 위해 만들어졌다기 보다는 이미 예전에 만들어져 왕의 무덤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왕을 떠받친 멘케레트 신의 형상-한 신이 수의를 입은 왕을 머리에 떠받치고 있는데, 멘케레트 신이 하늘을 향해 왕권의 형상을 받들어 오리는 모습을 나타낸다. 맨케레트는 장례 의시과 "사자의 서"에서만 알려져 있는 신이다. ↓

 

이 매는 뱀의 신상이 나온 바로 그 궤에서 발견됐다. 매는 두 개의 깃털 왕관을 쓰고 있고 적인 내용에 따르면 소프두라느느 이름으로 불렸다. 그는 이집트의 동부 사막을 감시하며 지배한, 삼각주 동부지역의 고대 신이었다. 그는 아마도 변경을 지키는 수호자 자격으로 왕의 장례식에 참석한것 같다. 전형적인 매의 특징인 눈 표시는 여러 색깔의 유리가 박혀 있다. ↓

 

이 조각상는 와의 장기를 보호하는 네 명의 신중 하나인 두아무테프를 묘사하고 있다. 자칼의 머리를 한 형상으로 나타낸다. 투탕카멘의 시대까지 이른바 카노포스 신들은 사람의 머리를 한 형태로 묘사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이런 동물 머리를 한 형태의 두아무테프와 사람의 머리를 지닌 형태의 다른 신상이 모두 발견됐다. 카노포스 신들은 장례 의식에서 죽은 자가 하늘로 올라가 밤 하늘에 있는 별로 환생하는 것을 돕는다. ↓

 

투탕카멘의 보물에서 여신의 미라 형상은 신의 상징인 구부러진 수염이 없다는 점에서 남성 신과 다르다. 네프티스는 그여의 여동생 이시스와 함께 조각난 오시리스의 시체를 모았다. 왕의 장례식에서 그녀는 죽은 왕이 승천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능성 때문에 죽은 왕이 '네프티스의 허벅지에 올라타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표현이 생겨났다. ↓

 

발 받침대가 있는 투탕카멘의 옥좌-이 유명한 옥자의 등받이에 새겨진 왕의 이름은 투탕카멘이 아홉살에 왕위에 오랐으며 당시에는 아직 투탕카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의자 등받이의 장면은 아마르나시대의 종교적 전통에 따라 생명을 주는 아텐의 태양 아래있는 국왕 부부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 쓰인 왕의 이름은 후에 '아멘'이 붙어 투탕카멘으로 수정됐다. 그림에서 투탕카멘은 편안한 자세로 기대어 쉬고 있고 , 그의 아내  안케세나멘은 옆에서 남편의 어깨에 향유를 발라주고 있다. 

나무 발 받침대는 푸른 파이앙스로 상감처리 되어 있다. 받침대에는 세 명의 누비아인과 다른 세 명의 근동 지방 사람들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파라오의 발밑에 굴복한 이국의 우두머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 

퍼온 사진 ↓ 

 

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투탕카멘의 흉상-이 조각상의 얼굴 표정은 확실히 투탕카멘을 닮았다. 이 조각상은 팔이나 다리가 없는 토르소 형태로서 기능이 명확하지 않다. 하워드 카터와 돌료들은 이 물건이 마네킹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옷이나 보석 장신구를 착용해보거나 보관 하는데 사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몸체에 남아있는 표시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 하지만 이 토르소가알려지지 않은 의식상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뱀 모양의 휘장을 한 왕관은 뒷 부분이 없어지고 노란 색상이 특이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하이집트의 붉은색 왕관을 연상케 한다.   ↓

 

국립과천과학관 (2011.12.23  맑음) 

창경궁 대온실(식물원)

 

 

 얼음이 얼어있는 춘당지의 원앙새 ↑↓

 

 

 백송(백松) ↓

 

동백나무 ↓ 

 

 

털머위 씨앗 ↓ 

 

털머위 꽃  (2005.11.2  찰영, 창경궁식물원) ↓ 

 

바위취 ↓ 

 

 

사스피레나무 ↓ 

 

다정큼나무 열매 ↓ 

다정큼나무 꽃 (2009.4.6  찰영, 창경궁식물원) ↓ 

서울특별시 종로구(鍾路區) 와룡동(臥龍洞) 창경궁 경내에 있는 온실이다. 2004년 2월 6일 등록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청장 소유이며 창경궁관리소장이 관리한다.

 

1909년에 건립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철골 구조와 유리, 목재가 혼합된 건축물이다. 창경궁 식물원은 일제가 순종을 창덕궁에 유폐시킨 뒤 왕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동물원과 함께 지은 것이다. 일본 황실 식물원 책임자였던 후쿠와가 1907년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에서 시공했는데 당시에는 동양 최대의 규모였다. 처음에는 대온실 후면에 원형 평면의 돔식 온실 2개를 서로 마주 보게 세웠으나 후에 돔식 온실 2개는 철거하여 현재 대온실만 남아 있다.

19세기 말 시작된 세계박람회 전시 건물의 형식을 따른 근대 건축물로 19세기부터 근대 건축에 사용되기 시작한 철과 유리가 우리나라의 건축물에 사용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창경궁 식물원 (2011.12.17  맑음) 

 

 

 

 

 

 

 

측우기(測雨器)

 

측우기는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하여 세종 23년(1441)에 세계 최초로 발명한 우량계(雨量計)이다. 세종대왕은 땅속에 스며 든 빛물의 깊이를 재어 강우량을 측정하던 종래의 불완전한 방법을 철로 주조한 원통형 우량계를 발명, 강우량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정확히 측정케 하였다.

지방에서는 서울의 철제 측우기의 모형으로 자기나 와기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이때 작품들은 남아있지 않다.

이 측우기는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를 본뜨고 대석은 기상청에 보관중인 관상감 측우대를 본떠 제작한 것이다.

보물 561호.

 

예로부터의 잦은 홍수와 가뭄으로 인한 피해 및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업생산구조는 일찍부터 강우현상에 주목하고 우량을 측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강우량 측정방법은 매우 부정확한 것이었으므로 보다 과학적인 측정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1441년(세종 23) 8월에 서운관(書雲觀)에서 측우기를 제작하게 되었다.


당시의 <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각 도 감사(監司)가 강우량을 보고하는 법이 있으나, 땅이 말랐을 때와 젖어 있을 때에 따라 땅속에 스며드는 빗물의 깊이가 같지 않아 그것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청컨대, 서운관에서 대를 만들고 깊이 2자(尺) 지름 8치(寸)의 철기(鐵器)를 주조하여 대 위에 놓고 빗물을 받아 본관원(本觀員)에게 그 깊이를 재어서 보고하게 하고…… 또한 외방(外方) 각 관에서는 경중(京中) 주기(鑄器)의 보기에 따라 자기(磁器)나 와기(瓦器)를 써서 객사의 뜰에 놓아두고 수령이 물의 길이를 재어서 감사에게 보고하게 하여 감사가 전문(傳聞)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에 따랐다." 이 기사는 불완전했던 강우량 측정법을 기기를 써서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역사적 기록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어떤 자로 언제 어떻게 잰다는 구체적인 측정법을 제시하지는 않은 점을 보아 측우기는 제작했으나, 우량의 측정 제도는 완전하게 확립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측우기에 의한 우량의 측정 제도가 확립된 것은 1442년 5월이다. 이때 처음으로 〈세종실록〉에 측우기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쇠를 부어 만든 측우기는 길이가 1자 5치, 지름이 7치로 개량되고, 강우량은 비가 그쳤을 때 주척(周尺)을 써서 자·치·푼(分)까지 정확하게 재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 일시와 갠 일시를 기록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강우량의 측정은 각 도와 군·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시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확정된 측우기는 높이 32㎝, 지름 15㎝가량의 철제 원통이고, 주척의 길이는 약 21㎝이다. 이때부터 측우기로 강우량을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일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측정된 강우량은 곧 집계되고 각 지방의 통계는 중앙에 정기적으로 보고되어 전국에 걸친 강우량이 정확히 기록·보존되었다. 강우량을 재는 과학적인 방법이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아직 싹트지 않았을 때 조선에서 확립되었음은 매우 큰 의의를 가진다.

 

1442년 5월 측우기를 이용한 강우량 측정 제도가 확립되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서울과 각 도, 그리고 군·현에 이르기까지 같은 규격의 측우기에 의한 강우량의 측정이 시작되어 이후 100여 년 동안은 잘 시행되었다. 그러나 그후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임진왜란의 참화는 측우기에 의한 강우량 측정의 전통을 단절시켰다. 단절의 시기는 1세기 반 이상이나 계속되었으며 세종 때 만든 측우기는 모두 유실되었다. 그후 숙종 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천문과학을 비롯한 과학기술의 새로운 기운은 영조 때에 이르면서 부흥하게 되었다. 이때 오랫동안 잊혀졌던 측우기 사용의 절실함과 그에 의한 강우량 측정의 과학적인 이치가 새삼스럽게 제기되었다. <증보문헌비교>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세종조의 옛 제도에 따라 측우기를 만들도록 명했다. 하교(下敎)하기를 실록 가운데에 측우기에 대한 조항을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일어나 앉게 된다. 요즈음은 비록 비를 비는 시기는 아니나 수표(水標)의 상황을 보고하게 하여 그 얕고 깊음을 알고자 하는데, 이 기기(機器)에는 지극한 이치가 담겨져 있으며 또 힘이 드는 것도 아니다. 이 제도에 따라 서운관으로 하여금 이를 만들어 8도에 놓게 하고 양도(兩都)에도 이를 만들어 놓게 하라.…… 지금도 그 예를 따라 경희궁과 창덕궁에 모두 측우기를 설치하라." 이리하여 1770년(영조 46) 5월 1일에 새 측우기가 다시 등장했다. 그것은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세종 때의 것과 같은 크기였다. 돌로 만든 대에는 측우대(測雨臺)라 새기고, 만든 연·월을 기록해놓았다. 지금 기상청에 보존되어 있는 것이 그때 만든 측우대 중의 하나이다. 이때 부활된 측우기에 의한 강우량의 측정제도는 다시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측우기는 지방에서도 청동으로 같은 규격에 따라 주조되어 전국적인 강우량의 통계가 정기적으로 집계되는 일도 계속되었다. 〈정조실록〉에 기록된 1792년(정조 16) 이후 8년간의 강우량 통계는 조선시대의 강우량 관측 결과의 공식 자료로서 매우 귀중한 것이다. 또 1799년 5월의 기사에는 전년의 같은 달인 5월 한 달 동안의 강우량과 그해 5월의 강우량을 비교하고 있어 월계(月計)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측우기는 1782년에도 만들어졌다. 지금 여주 세종대왕릉의 전시실에 보존되어 있는 기념비적 대리석 측우대는 그 유물이다. 거기에는 측우기 제작의 역사와 의의를 말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또 국립중앙과학관에 보존되어 있는 1811년의 측우대는 순조 때에도 측우기가 만들어졌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측우기는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 관서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제작되었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837년에 공주 감영에서 제작된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뿐이다. 현재 보물 제561호로 지정되어 기상청에 보존되어 있는데, 안지름 14.0㎝, 깊이 31.5㎝의 청동제로 무게가 6.2㎏이다. 이 측우기는 1971년에 일본 기상청에서 반환된 것인데, 3단으로 분리할 수 있게 조립식으로 만든 것이 특이하다. 측우기 유물은 1920년초의 보고에 의하면 1770년 영조 때에 만들어진 3개가 측우대와 함께 남아 있었고 그밖에도 몇 개가 더 남아 있었다. 그러나 현재 금영측우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실되고 없으며 측우대도 5개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이 대석들에는 윗면에 지름 16.0~16.5㎝가량의 구멍이 있어서 직경 15㎝가량의 측우기를 올려놓고 우량을 측정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측우기는 15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세계 최초의 기상 관측기기이다. 조선에서는 이 기기를 이용해 수백 년 동안 전국적으로 강우량 측정을 했다. 초기의 관측기록은 거의 없어졌지만, 1770년 이후부터 140년 동안의 서울 관측기록이 남아 있다. 그것은 현대의 관측치까지 합하면 220년 이상의 연속 관측기록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귀중한 자료이다.

 

영릉 (2011.7.26  흐림) 

글씨가 있는 불비상(佛碑像, Stele with Buddha images)

 

남북국시대(발해) 834년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가르침을 듣는 승려와 보살이 세겨져 있다. 용으로 보이는 동물 2마리가, 아래에는 글씨(銘文)와 인왕상이 각각 새겨져 있다. 글씨는 함화 4년(834) 발해 허왕부(許王府)의 관리였던 조문휴(趙文休)의 어머니가 모든 불제자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발해에서 '함화(咸和)'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 허왕(許王)이 관할하던 관청이 있었고, 그 허왕위에 발해 황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앙국립박물관 (2009.3.17)

탈 조가비(Shell mask)

 

부산 동삼동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유물인데 가리비 껍데기에 작은 구멍 두 개를 내어 눈을 만들고, 큰 구멍 하나를 뚫어 입을 만들었다. 눈과 입 사이의 비례나 구도, 크기가 보통 솜씨가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 (2009.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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