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위궁재사(昌寧尉宮齋舍)-등록문화재 제40호

 

북서울숲입구 우측에 등록문화재 제40호인 창녕위궁재사가 있다.

이는 조선 제23대 순조의 딸 복온공주(福溫公主:1818~1832)와 부마 창년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의 재사(齋舍)이다.

정면2칸, 측면2칸의 전통 한식 건축 양식의 단층목조 기와집으로 높은 장대석 기단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한일병합 후 김병주의 손자 김석진(金奭鎭:1847~1910)이 일본의 남작작위를 거절하고, 을분을 참지 못하여 순국 자결한 곳이기도

하다. 

인조반정 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신경진(申景鎭:1575~1643)의 별장이었으며 이후 재실이 되었습니다. 

 

오른쪽의 사랑채는 원형 그대로 보존 되었으며 왼쪽의 재사는 1800년대에 지은 건물이고, 정면의 안채는 8.15광복후 개축하였다가

6.25전쟁 때 파괴되어 이후 재건축한 것입니다. 

역사적, 건축적으로 가치가 높은 건축물입니다. 

 

 

 

 

 

 

북서울숲 (2009.12.24) 

앙구일구(仰釜日晷, 해시계)-보물 제845호

 

앙부일구(仰釜日晷) 1434년 조선 세종대왕 16년에 만들어진 해시계이다.  대한민국 보물 제845호로 지정되어 있다. 과학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으며, 예술품으로서도 인정받고 있다.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오목한 화로 크기의 둥근 가마솥 시계판 모양 해를 우러르고 있다고 해서 앙부일부라는 이런 이름을 붙였다. 오목한 지구의처럼 생겨 시각선, 계절선을 나타내는 데 효과적이다. 청동을 재료로 하여 주물을 부어 만들고 글자와 선은 흑색칠 바탕에 은상감(銀象嵌)을 하여 뚜렷이 보이게 하였다.4개의 발은 수평을 맞추기 위하여 수평기준장치를 십자(十字)의 형태로 하였다.

 

시판은 동지(冬至) 쪽에서 시작하여 하지(夏至)에 이르기까지 24절기를 13선의 위선(緯線)으로 긋고 이에 수직으로 시각선(時刻線)을 그었다. 위도에 따라 그림자의 길이를 달리하기 위해, 영침(影針), 즉 그림자바늘은 당시 한양에서 사용하던 북극출지(北極出地) 37도 20분에 맞춰서 비스듬이 꽂아서 사용하였다. 

 

당시의 시간은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의 12간지로 표현을 하였으며, 시간의 단위가 12이기 때문에 2시간이 한 묶음의 시간이었다.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12지신을 그림으로 그려 1434년 10월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앞에 설치를 하였다. 

 

광화문 (2009.12.1)

혼천의(渾天儀)

 

세종 때 만들어진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여 천문시계의 구실을 하였던 기구를 가리킨다.  

선기옥형(璇璣玉衡)·혼의(渾儀)·혼의기(渾儀器)라고도 한다. 고대 중국의 우주관이던 혼천설에 기초를 두어 BC 2세기경 중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확실한 자료가 없어 추론에 불과하나, 삼국시대 후기에서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만들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기록상으로는 <<증보문헌비고>> 상위고(象緯考) 의상(儀象)조에 1433년(세종 15) 정초(鄭招)·정인지(鄭麟趾) 등이 고전을 조사하고 이천(李)·장영실(蔣英實) 등이 그 제작을 감독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때 혼천의는 (元)나라 학자 오징(吳澄)이 쓴 찬언(纂言)에 기재된 바에 따라 칠목(漆木)으로 만들고, 다시 구리를 부어 만들었다. 또 1548년(명종 3)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혼천의를 만들어 홍문관(弘文館)에 두었다. 이어 1601년(선조 34)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에게 명하여 혼천의를 만들도록 했다. 이로부터 천문학의 기본적인 기구로서 조선시대 천문역법(天文曆法)의 표준시계와 같은 구실을 하게 되어 1657년(효종 8)에는 최유지(崔攸之)가, 1669년(현종 10)에는 이민철(李敏哲)과 송이영(宋以穎)이 각각 만들었다. 이 중 송이영의 것은 서양식 자명종의 원리와 특징을 잘 살펴 추(錘)를 시계장치의 동력으로 이용한 것이다.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된 송이영의 혼천의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혼천의는 두 추의 운동에 의하여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여러 개의 톱니바퀴에 의하여 연결되었는데, 이는 육합의(六合儀)·삼진의(三辰儀)·지구의(地球儀)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육합의는 24향(向)의 글자가 새겨진 지평환(地平環), 수직으로 주천도(周天度)가 새겨져 있는 천경흑쌍환(天經黑雙環), 위로 36° 기운 북극과 아래로 36° 기운 남극에 걸쳐 주천도가 새겨진 천위적단환(天緯赤單環)으로 이루어져, 동서남북·천정(天頂)·천저(天底)를 정하게 되어 있다.

 

삼진의는 삼진의 흑쌍환(黑雙環)·적도단환(赤道單環)·황도단환(黃道單環), 그 안에 백도단환(白道單環), 제일 안에 양극의 축에 걸쳐 있는 흑도단환(黑道單環) 등으로 이루어졌다. 흑도단환에는 12궁(宮)·24기(氣)와 28수(宿)가 양면에 각각 새겨지고 360으로 분할되어 있으며, 백도단환에는 27개의 못으로 분할하여 28수를 나타냈다. 지구의는 남북극을 축으로 시계장치에 연결하여 1일 1회전하게 하였다.

 

광화문 (2009.12.1)

측우기(보물 제561호)

 

조선 세종 이후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하여 쓰인 기구로 1441년 세종 23년 8월에 호조가 측우기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다음해 5월에는 측우에 관한 제도를 새로 제정하고 측우기를 만들어 서울과 각 도의 군현에 설치하였다.  조선 세종 때의 측우기가 과학사상 뜻깊은 것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쓰였다는 사실이다. 

 

1441년(세종 23) 8월에 호조()가 측우기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다음해 5월에는 측우에 관한 제도를 새로 제정하고 측우기를 만들어 서울과 각 도()의 군현()에 설치하였다. 원래 측우기가 쓰이기 이전에는 각 지방의 강우량의 분포를 알아내는 데 매우 불편하였다. 즉, 비가 내림으로써 흙속 깊이 몇 인치까지 빗물이 스며들었는지를 일일이 조사해 보아야 하는데, 이때 흙에는 마르고 젖음이 같지 않아 강우량을 정확히 알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측우기는 일정기간 동안 그속에 괸 빗물의 깊이를 측정하여 그 곳의 강우량으로 하기로 되어 있다.

측우기는 안지름이 주척()으로 7인치(14.7cm), 높이 약 1.5척의 원통으로 되어 있는데, 비가 올 때 이 원통을 집밖에 세워 두면 빗물을 받을 수가 있다. 측우기에 괸 물의 깊이는 자[]로 측정한다. 즉, 대()를 관상감에 만들어서 측우기를 대 위에 올려놓고 비를 받도록 하는데, 관상감의 관원이 직접 주척으로 물의 깊이를 측정하여 보고한다. 중앙에는 관상감에, 지방에는 각 도의 감영()에 설치하였다. 처음에 철로 만들었으나, 뒤에 구리로 만들어 쓰기도 하였고, 지방에서는 자기()·와기() 등을 쓰기도 하였다. 주척은 나무 또는 대나무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조선 세종 때의 측우기가 과학사상 뜻깊은 것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쓰였다는 사실이다. 유럽에서는 1639년 로마에서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가 처음으로 측우기로 강우량을 관측하였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1658년부터, 영국에서는 1677년부터 관측하였다. 한국에서는 이미 1442년 5월부터 측우기로 우량을 측정하였으며, 이것은 이탈리아보다도 약 200년이 빠르다. 금영측우기는 1837년(헌종 3)에 만든 것으로 보물 제561호로 지정되어 기상청에 소장

되어 있다.

 

광화문 (2009.12.1)

효자각(孝子閣). 효자문(孝子門)

 

나라에서 허권(許權 1847~1895)에게 내린 효자 정려(孝子旌閭 효자에 내린 표창)를 기념한 효자비(孝子碑)의 보호 건물과 출입문) 

효자각은 연꽃 봉우리·용·봉황 등을 조각하고 단청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효자문에는 '孝子門' 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고, 주위에는 호랑이와 매란국죽이 그려져 있다. 효자각과 효자문을 통해 효(孝)를 중시했던 당시의 사회상과 건축기술, 공예문화를 엿볼 수 있다.

 

이 건물은 허권 후손의 살림집 안에 있었으나 2005년 홍수로 손상되는 등 보존하기가 어려워 2006년 이곳(경복궁)으로 옮겨서 보존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물에 잠겨 썩은 기둥 일부를 보수하였고 담장은 영역만을 표시해 놓았다.

 

연대 : 20세기초    원소재지 :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월천리

 효자문

 효자문 안쪽에 효자비

 뒤편에서 본 효자각과 효자문

 

경복궁 (2008.9.15)

철거되는 숭례문

 

2008.2.14일 오후 남대문을 찾아가 장막에 가려지는 숭례문의 마지막 모습을 사진에 담아 보았다. 여기 저기서 들려오는 탄식과 원망이 끊임없이 들려온다. 가는 정권이나 오는 정권에 대한 부담은 모두 자유롭지 않다는 민심을 읽을 수 있었다.  참여정부의 무능과 무관심속에 잃어버린 한민족의 얼과 상징의 마지막 모습 하나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현실에 더 답답함을 느꼈다.   

 

 

 

 

 

 

 

 

 

남대문에서 (2008.2.14) 

화마로 잃은 숭례문

 

어제 저녁 9시경 숭례문(남대문, 국보 1호)의 화재소식을 접하고 TV중계를 보며 근 4시간을 마음조리며 불길이 잡히기를 기대했지만 새벽 1시 50여분경 숭례문이 불길에 무너저 내리는 안타까운 장면을 보며 허탈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최근에 우리가 경험한 대형사고로 이천 냉동공장화재, 서해 유조선 기름유출사고로 아직도 상처가 가시지 않고 있는데 또 다시 소중한 우리문화유산을 화재로 잃는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이번에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국보 1호 숭례문을 잃고 말았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우리는 사고가 날때마다 시끄럽게 떠들다 흐지부지 하지 말고 조용히 두번다시 작은 사고라도 재발하지 않도록 근본적 대책을 마련해 국민들이 마음놓고 생활에 전념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06년 3월 3일 숭례문 100년만의 개통식날 숭례문을 공개하여 가까이서 돌아 볼 수가 있었던 사진을 찾아 올리며 아쉬움을 달래보며 소중한 우리문화유산이 영원히 보존이 되기를 바란다.   

 

 

 

숭례문 100년만의 개통식(2006년 3월 3일 행사)

 

우리나라 국보 1호인 숭례문의 중앙통로인 홍예문이 100년만에 일반에 개방하는 행사가 오늘 오전 11시에 숭례문에서 열렸다. 이어서 정조대왕 화성행차및 과거를 보러 서울로 들어오는 선비의 행렬, 시집가는 가마와 상인들의 행열에 이어 각설이패의 행렬을 끝으로 일반인들이 홍예문을 지나는 순서로 이어저 많은 시민들이 홍에문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좁은 통로에 많은 카메라맨이 사진을 찍고 있어 행사장은 아주 복잡했다. 오늘은 2층 문루까지 개방이 되어 2층 문루에서 주변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숭례문은 서울성곽의 정문이며 도성의 남쪽에 있어 남대문으로 불린다. 태조 7년(1398)에 처음 건립한 후 세종 30년(1448)에 크게 고쳤다고 한다. 석축 중앙에 무지개 모양의 문인 홍예문이 있으며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인 2층 문루를 세우고 다시 그 위에 처마를 4면에 두는 우진각 지붕을 얹었다. 처마 끝은 여러 개의 나무로 짜 맞추어 댄 전형적인 다포(多包) 양식의 건물로서, 현존하는 성문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건물내부의 위층 바닥은 널판지로 깐 널마루이고 아래층 바닥은 홍예의 윗면인 중앙칸만이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짠 우물마루일 뿐 다른 칸은 흙바닥으로 되어있다.

문에 걸린 현판인 편액의 글씨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지봉유설)에는 양녕대군이 쓴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숭례문의 편액이 여느 문의 편액과 달리 세로로 쓰여있는 것은 숭례(崇禮)의 두 글자가 위아래로 있을 경우 불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로써 경복궁을 마주 보는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한다.

 

홍예문 개통식 행사

행사에 참가한 시민

수문장

통과절차 의식

어가행렬

은물(恩物)행렬

정조대왕

문무백관

과거 보러오는 선비행렬

말탄 신랑과 가마탄 혼례행렬

상인행렬

 

각설이 행렬

파수군이 호패가 없다고 않된다하여 떼를 쓰는 각설이

일반 시민들이 100년만에 홍예문을 통과하는 대열

홍예문 천정 벽화(남측에서 본)

홍예문(북측에서 본)

2층 문루를 오르는 시민들

 

2층 문루내부

 

2층 문루 처마

 

 

 

2층 문루를 보고 내려오는 대열

홍예문 문고리

숭례문 전경

계속 이어지는 2층 문루로 오르는 대열

은물(恩物)

혼례용 가마

상인들의 매물

2006.3.3 숭례문 100년만의 개통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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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장대-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으로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이곳 청량산에 있다.

성안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어졌으며 왼쪽에는 사당인 청량당이 있다.

뒤쪽에는 2개의 우물이 있어 장대를 지키는 병사들에게 물을 공급하였다.

 

이 건물은 인조 3년(1624)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 누각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초 27년

(1751)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 누각으로 다시 쌓고 수어장대 라는 편액을 달았다.

 

특히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가 친히 군사들을 지휘 격려하며 45일 간 항전하던 곳이다.  수어장대는

아래층이 정면 5칸 측면 3칸, 위층이 정면 3칸 측면 2칸인 팔작지붕 양식의 이층 누각이다. 지붕은

위아래 모두 겹처마를 둘렀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올렸으며 용마루에

는 취두를 올렸다. 건물의 기둥은 높이 60cm의 팔각장주초석 위에 올려져 있고, 포는 주심포 양식

의 이출목 익공식이다.

수어장대 입구 돌계단 

 

수어장대 

 

 

무망루 내역의 비문 

사당인 청량당  

남한산성 (2007.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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