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우기(測雨器)

 

측우기는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하여 세종 23년(1441)에 세계 최초로 발명한 우량계(雨量計)이다. 세종대왕은 땅속에 스며 든 빛물의 깊이를 재어 강우량을 측정하던 종래의 불완전한 방법을 철로 주조한 원통형 우량계를 발명, 강우량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정확히 측정케 하였다.

지방에서는 서울의 철제 측우기의 모형으로 자기나 와기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이때 작품들은 남아있지 않다.

이 측우기는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를 본뜨고 대석은 기상청에 보관중인 관상감 측우대를 본떠 제작한 것이다.

보물 561호.

 

예로부터의 잦은 홍수와 가뭄으로 인한 피해 및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업생산구조는 일찍부터 강우현상에 주목하고 우량을 측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강우량 측정방법은 매우 부정확한 것이었으므로 보다 과학적인 측정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1441년(세종 23) 8월에 서운관(書雲觀)에서 측우기를 제작하게 되었다.


당시의 <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각 도 감사(監司)가 강우량을 보고하는 법이 있으나, 땅이 말랐을 때와 젖어 있을 때에 따라 땅속에 스며드는 빗물의 깊이가 같지 않아 그것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청컨대, 서운관에서 대를 만들고 깊이 2자(尺) 지름 8치(寸)의 철기(鐵器)를 주조하여 대 위에 놓고 빗물을 받아 본관원(本觀員)에게 그 깊이를 재어서 보고하게 하고…… 또한 외방(外方) 각 관에서는 경중(京中) 주기(鑄器)의 보기에 따라 자기(磁器)나 와기(瓦器)를 써서 객사의 뜰에 놓아두고 수령이 물의 길이를 재어서 감사에게 보고하게 하여 감사가 전문(傳聞)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에 따랐다." 이 기사는 불완전했던 강우량 측정법을 기기를 써서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역사적 기록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어떤 자로 언제 어떻게 잰다는 구체적인 측정법을 제시하지는 않은 점을 보아 측우기는 제작했으나, 우량의 측정 제도는 완전하게 확립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측우기에 의한 우량의 측정 제도가 확립된 것은 1442년 5월이다. 이때 처음으로 〈세종실록〉에 측우기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쇠를 부어 만든 측우기는 길이가 1자 5치, 지름이 7치로 개량되고, 강우량은 비가 그쳤을 때 주척(周尺)을 써서 자·치·푼(分)까지 정확하게 재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 일시와 갠 일시를 기록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강우량의 측정은 각 도와 군·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시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확정된 측우기는 높이 32㎝, 지름 15㎝가량의 철제 원통이고, 주척의 길이는 약 21㎝이다. 이때부터 측우기로 강우량을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일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측정된 강우량은 곧 집계되고 각 지방의 통계는 중앙에 정기적으로 보고되어 전국에 걸친 강우량이 정확히 기록·보존되었다. 강우량을 재는 과학적인 방법이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아직 싹트지 않았을 때 조선에서 확립되었음은 매우 큰 의의를 가진다.

 

1442년 5월 측우기를 이용한 강우량 측정 제도가 확립되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서울과 각 도, 그리고 군·현에 이르기까지 같은 규격의 측우기에 의한 강우량의 측정이 시작되어 이후 100여 년 동안은 잘 시행되었다. 그러나 그후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임진왜란의 참화는 측우기에 의한 강우량 측정의 전통을 단절시켰다. 단절의 시기는 1세기 반 이상이나 계속되었으며 세종 때 만든 측우기는 모두 유실되었다. 그후 숙종 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천문과학을 비롯한 과학기술의 새로운 기운은 영조 때에 이르면서 부흥하게 되었다. 이때 오랫동안 잊혀졌던 측우기 사용의 절실함과 그에 의한 강우량 측정의 과학적인 이치가 새삼스럽게 제기되었다. <증보문헌비교>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세종조의 옛 제도에 따라 측우기를 만들도록 명했다. 하교(下敎)하기를 실록 가운데에 측우기에 대한 조항을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일어나 앉게 된다. 요즈음은 비록 비를 비는 시기는 아니나 수표(水標)의 상황을 보고하게 하여 그 얕고 깊음을 알고자 하는데, 이 기기(機器)에는 지극한 이치가 담겨져 있으며 또 힘이 드는 것도 아니다. 이 제도에 따라 서운관으로 하여금 이를 만들어 8도에 놓게 하고 양도(兩都)에도 이를 만들어 놓게 하라.…… 지금도 그 예를 따라 경희궁과 창덕궁에 모두 측우기를 설치하라." 이리하여 1770년(영조 46) 5월 1일에 새 측우기가 다시 등장했다. 그것은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세종 때의 것과 같은 크기였다. 돌로 만든 대에는 측우대(測雨臺)라 새기고, 만든 연·월을 기록해놓았다. 지금 기상청에 보존되어 있는 것이 그때 만든 측우대 중의 하나이다. 이때 부활된 측우기에 의한 강우량의 측정제도는 다시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측우기는 지방에서도 청동으로 같은 규격에 따라 주조되어 전국적인 강우량의 통계가 정기적으로 집계되는 일도 계속되었다. 〈정조실록〉에 기록된 1792년(정조 16) 이후 8년간의 강우량 통계는 조선시대의 강우량 관측 결과의 공식 자료로서 매우 귀중한 것이다. 또 1799년 5월의 기사에는 전년의 같은 달인 5월 한 달 동안의 강우량과 그해 5월의 강우량을 비교하고 있어 월계(月計)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측우기는 1782년에도 만들어졌다. 지금 여주 세종대왕릉의 전시실에 보존되어 있는 기념비적 대리석 측우대는 그 유물이다. 거기에는 측우기 제작의 역사와 의의를 말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또 국립중앙과학관에 보존되어 있는 1811년의 측우대는 순조 때에도 측우기가 만들어졌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측우기는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 관서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제작되었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837년에 공주 감영에서 제작된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뿐이다. 현재 보물 제561호로 지정되어 기상청에 보존되어 있는데, 안지름 14.0㎝, 깊이 31.5㎝의 청동제로 무게가 6.2㎏이다. 이 측우기는 1971년에 일본 기상청에서 반환된 것인데, 3단으로 분리할 수 있게 조립식으로 만든 것이 특이하다. 측우기 유물은 1920년초의 보고에 의하면 1770년 영조 때에 만들어진 3개가 측우대와 함께 남아 있었고 그밖에도 몇 개가 더 남아 있었다. 그러나 현재 금영측우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실되고 없으며 측우대도 5개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이 대석들에는 윗면에 지름 16.0~16.5㎝가량의 구멍이 있어서 직경 15㎝가량의 측우기를 올려놓고 우량을 측정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측우기는 15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세계 최초의 기상 관측기기이다. 조선에서는 이 기기를 이용해 수백 년 동안 전국적으로 강우량 측정을 했다. 초기의 관측기록은 거의 없어졌지만, 1770년 이후부터 140년 동안의 서울 관측기록이 남아 있다. 그것은 현대의 관측치까지 합하면 220년 이상의 연속 관측기록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귀중한 자료이다.

 

영릉 (2011.7.26  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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