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Tutankhamum His tomb and his treasures)-(1/2)

 

1. 투탕카멘

 

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제12대 왕(재위 BC 1361∼BC 1352)으로 18세에 요절하여 알려진 것이 없었으나 '왕가의 계곡'에 있는 왕묘가 발굴되면서 유명해졌다. 정확하게는 투트 앙크 아멘이라 한다. 제10대 왕 이크나톤(아멘헤테프 4세)의 아우 또는 조카라고도 하는데, 출생에 관해서는 확실하지가 않다. 제11대 세멘크카라는 만년에 이크나톤과 공통통치를 펼쳤으나 재위 3년 만에 죽었기 때문에 9세에 즉위하였다. 왕비는 이크나톤과 네페르티티의 제3왕녀인 안케센아멘이다.

왕은 처음에는 아텐 신앙을 나타내는 투트 앙크 아텐으로 칭하였으나, 즉위 4년째 아멘 신앙을 나타내는 투트 앙크 아멘으로 개칭하고 수도를 아마르나에서 테베로 옮겼다. 연소한 투탕카멘
이 당시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중신 아이와 노장 할렘헤브(모두 후에 국왕)의 보좌에 힘입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투탕카멘은 BC 1361년 9세의 나이로 이집트의 파라오에 등극, 18세에 사망할 때까지 9년간 재위했으며그러나 18세의 젊은 나이에 죽은 왕의 죽음에 대한 의혹은 풀리지 않고 있었으며, 업적에 관한 기록도 남겨지지 않아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1922년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에 의해 룩소르 부근 나일강 서안의 '왕들의 계곡'에서 발견됐다. 투탕카멘 무덤은 도굴되지 않은 유일한 이집트 왕릉으로 3300년만에 완전한 상태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2. 누가 발견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 1874.5.9~1939.3.2)는 영국의 고고학자이며 이집트 투탕카멘의 묘를 발굴하였다. 워드 카터는 1874년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캥신턴에서 태어났다. 그는 17살에 대영박물관에서 고고학을 배운 후 당시 최고의 고고학자였던 윌리엄 피트리에게 고고학을 배운 뒤 이후 이집트 고고국의 국장인 가스통 마스페로의 후원으로 1901년부터 왕가의 계곡에서 투트모세 4세 · 아멘호테프 1세 등의 묘를 발견했다.

그 후, 조지 하버드 카너본 경의 후원으로 1922년 11월 4일에 고대 이집트의 왕 투탕카멘의 왕묘를 발견하였다. 흔히 투탕카멘 묘를 발굴할 때의 파라오의 저주가 유명한데, 이 중 하워드 카터가 키우던 애완새 카나리가 코브라에게 잡혀먹혔으므로 몇몇 발굴 인부들은 발굴작업에 불길한 징조라고 두려워 하였다. 왜냐하면 코브라는 이집트 왕의 머리를 장식하는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23년에 그의 발굴을 후원하던 조지 하버트 카너본 경이 사망하자 투탕카멘의 저주를 받아 사망하였다는 소문이 펴졌다. 그러나 1933년 나치 독일의 고고학자인 슈타인도로프는 발굴 작업이 진행되던 중에 죽은 21명의 죽음을 일일이 조사하여,나이가 들어 죽었거나 발굴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의 죽음, 또는 우연한 죽음이었다고 진상을 밝혔다. 파라오의 관에 일반적으로 '사자의 안녕을 방해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라'라는 문구가 쓰여진 것이 사실이나,투탕카멘의 관에는 이와 정반대로 '왕의 이름을 알리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라는 말이 쓰여 있다.

 

그 후 6년에 걸쳐 발굴 작업이 계속진행되었고 이집트학에 풍부하고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하워드 카터는 투탕카멘 왕묘의 발굴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발굴작업을 하지 않았으며 1932년 영국으로 돌아갔다. 1939년 3월 2일 65세의 나이로 죽었다..

3. 발굴상태

 

1922년 카터(Howard Carter, 1873~1939)에 의해서 발견된 왕묘는 짧은 계단과 통랑이 전실, 부속실, 현실, 보고의 4실로 통하는 이례적인 소형의 것으로, 벽화도 현실(玄室)에만 있다. 4겹으로 된 대형 황금칠의 목관, 석관, 3겹의 인형관에 안치된 황금 마스크를 쓴 왕의 미이라를 비롯해, 대량의 부장품은 거의 완전한 채로 남아 있어 도굴을 면한 <왕가의 계곡> 유일한 왕묘로서 당시의 파라오의 매장관습을 아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1703점의 출토품 중에는 왕의 부활에 필요한 내장을 넣은 카노포스 용기나 신상, 왕상 외에 현세와 마찬기지로 내세의 생활에 필요한 왕좌 • 침대 • 함 등의 가구나 그릇, 의류, 장신구, 무기, 수렵구, 전차 등이 포함되어, 당시의 호화로운 궁정생활과 높은 공예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현실에 그대로 남아 있는 석관, 미이라형 관, 미이라를 제외한 유품의 대부분은 이집트의 카이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집트 ‘왕가의 계곡’에 있는 투탕카멘 왕의 묘(제62호)에서 출토한 부장품의 총칭. 영국 귀족 카나본(Lord Herbert, 5th Earl of Carnarvon, 1866~1923)의 후원 아래 1922년 카터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현존하는 고대 이집트 유물 중 가장 호화롭고 종류가 많은 일괄유물로서 유명. 묘는 거의 도굴을 면하였으므로 당시 국왕의 매장 풍습을 연구하는데 매우 귀하다. 중요한 출토품은 왕의 미라를 넣은 황금제 및 목제 금칠한 3중관(棺), 3중관을 넣은 석관 및 그것을 넣은 4중의 감실상자, 미라의 얼굴을 덮은 황금 마스크, 내장을 담은 4개의 황금제 소형관, 귀중한 신상(분실)을 넣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금칠한 감실상자, 장례용 침대, 옥좌, 많은 부적, 황금 및 보석제의 각종 장신구, 그외에 전차, 무기, 대소의 상자를 비롯한 많은 생활용품 등이다. 아마르나 미술의 양식을 보존한 후(後) 아마르나 미술의 특징을 나타내며 당시의 궁정 공예수준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발굴 당시 투탕카멘의 무덤에선 110kg짜리 황금 관(棺)과 황금마스크(11kg) 등 호화찰란한 금은보화와 합금되지 않은 철, 3천여년동안 마르지 않은 향료 등 2천여점의 귀중한 유물이 나왔다.

 

4. 언제까지 전시

전세계 고고학계를 깜작 놀라게 한 바로 그 전시가 이집트 파라오 투탕카멘의 유물 천여점을 최첨단 기술로 복원, 파라오 무덤 발굴 당시 상태 그대로 재현, 투탕카멘 복원 유물 1,300여점, 전시장 규모 800평의 규모로 이집트에 가도 다 볼 수 없는 유물들을 한자리에서 현재까지 유럽 12개 도시 300만명 이상 관람한 찬란한 이집트 문명의 영적 세계로 떠나는 여행을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 것이다.

 

전시기간 : 2011년 10월 15일~2012년 2월 26일

전시장소 : 국립과천과학관 특별전시실(지하철 4호선 서울대공원역 5번출구)

관람시간 : 평일/주말 오전 9시 30분~오흐 6시 30분

휴 관 일 : 매주 월요일(사진찰영은 후레쉬없이 가능함)

 

5. 전시장

전시장 매표소 ↑↓

 

발굴당시의 4개의 방으로 구분하여 전시가 되고 있다. ↓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는데 기여를 한 로제타스톤 ↓

 

투탕카멘석상 ↑↓

 

별실의 부장품 ↑↓

 

보물의 방 유물 ↓

 

 

전실에서 유물을 발굴한 후, 하워드 카터와 카나번경은 1923년 2월 17일 현실을 열었다. 이 방은 하나의 커다란 금박 사당이 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당의 덮개를 열자 내부에는 사당이 3개가 더 들어있었다. 4번째인 가장 안쪽의 사당 안에서 발굴자들은 무거운 석관을 발견하였는데, 그 안에 3개의 관이 있었다. 석관과 관을 열기 위해 사당을 먼저 해체하고 치우는데만 몇 달이 걸렸으며, 비좁은 공간에서의 작업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서관 내부에서 카터는 마침내 미라 형태의 관 3개를 발견했으며 이들 관 내부에도 하나씩 더 겹쳐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장 안쪽의 관은 110k의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안에는 머리에 황금 마스크를 쓴 투탕카멘 왕의 미라가 들어 있었다.

 

바깥쪽 함과 묘실 벽 사이의 좁은 통로에도 많은 물건이 놓여 있는데, 왕이 하늘을 가로질러 항해할 때 쓰는 노(오른쪽)도 있다. 나머지 것들은 개봉된 사당 안에 있던 기름 렘프 등을 포함하여 이집트인의 일상 생활용품들이다. 램프는 연못에서 떠다니는 연꼿의 꽃보옹리와 잎으로 표현되어 있다. ↓ 

 

 

 

 

 

 

 

 

 

미이라의 내장을 보관한 용기 ↓

퍼온사진 ↓ 

 

카나프스 사당-카나프스 사당은 미라의 내장을 보관하는 카나프스를 담아두는 궤짝이다. 궤짝 4면에는 장기를 몸으로 지키는 4명의 여신이 둘러서 있다. ↓

 

사후세계에서 왕을 대신하여 일할 하인들 ↓

 

왕은 조그만 파피루스 보트에 서서, 발 하나를 앞에 두고 작살을 던지는 행동을 취하고 있다. 사냥감이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호루스 신화에서 세트신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하마일 것이다. 조각상이 나온 사당에서는 이것과 한 쌍이되는 다른 조각상도 발견됐다. 다른 한쌍의 조각상은 아마도 국가 예식에서 호루스 신의 역할을 하는 왕의 모습을 나타냈을 것이다.↓

 

세 개의 왕의 조각상은 각각 한 손에 도리깨 홀을 쥐고 있으며 받침대에는 왕의 이름인 투탕카멘이 새겨져 있다. 각각  이집트의 남부와 북부 왕관을 쓴 두 조각상이 왼손에 기다란 갈고리 창 홀을 쥐고 있는 모습은이들이 한 쌍을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얼굴이 투탕카멘과 닮지 않고 아르마나 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특별히 투탕카멘의 장례를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장례식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다.

 

곧은 지팡이를 잡고 하 이집트의 왕관을 쓰고 있는 세 번째 조각상은 어린 시절 투탕카멘의 얼굴과 비슷하다. 그러나 상이집트를 대표하는 조각상 중 이 같은 조각상은 결코 발견된 적이 없다. ↓

 

 

 

검은 표범을 탄 왕의 조각상은 왼손에 긴 지팡이홀을, 오른 손에는 도리깨를 쥐고 있다. 표범은 자신의 몸에 죽은 왕을 받아들이는 고대 하늘의 여신을 형상화 하고 있다. 이 조각상과 쌍을 이루는 조각상은 전통적 양식이 아닌 아마르나 시대의 변형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이것은 조각상이 투탕카멘이 죽은 후 장례를 위해 만들어졌다기 보다는 이미 예전에 만들어져 왕의 무덤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왕을 떠받친 멘케레트 신의 형상-한 신이 수의를 입은 왕을 머리에 떠받치고 있는데, 멘케레트 신이 하늘을 향해 왕권의 형상을 받들어 오리는 모습을 나타낸다. 맨케레트는 장례 의시과 "사자의 서"에서만 알려져 있는 신이다. ↓

 

이 매는 뱀의 신상이 나온 바로 그 궤에서 발견됐다. 매는 두 개의 깃털 왕관을 쓰고 있고 적인 내용에 따르면 소프두라느느 이름으로 불렸다. 그는 이집트의 동부 사막을 감시하며 지배한, 삼각주 동부지역의 고대 신이었다. 그는 아마도 변경을 지키는 수호자 자격으로 왕의 장례식에 참석한것 같다. 전형적인 매의 특징인 눈 표시는 여러 색깔의 유리가 박혀 있다. ↓

 

이 조각상는 와의 장기를 보호하는 네 명의 신중 하나인 두아무테프를 묘사하고 있다. 자칼의 머리를 한 형상으로 나타낸다. 투탕카멘의 시대까지 이른바 카노포스 신들은 사람의 머리를 한 형태로 묘사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이런 동물 머리를 한 형태의 두아무테프와 사람의 머리를 지닌 형태의 다른 신상이 모두 발견됐다. 카노포스 신들은 장례 의식에서 죽은 자가 하늘로 올라가 밤 하늘에 있는 별로 환생하는 것을 돕는다. ↓

 

투탕카멘의 보물에서 여신의 미라 형상은 신의 상징인 구부러진 수염이 없다는 점에서 남성 신과 다르다. 네프티스는 그여의 여동생 이시스와 함께 조각난 오시리스의 시체를 모았다. 왕의 장례식에서 그녀는 죽은 왕이 승천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능성 때문에 죽은 왕이 '네프티스의 허벅지에 올라타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표현이 생겨났다. ↓

 

발 받침대가 있는 투탕카멘의 옥좌-이 유명한 옥자의 등받이에 새겨진 왕의 이름은 투탕카멘이 아홉살에 왕위에 오랐으며 당시에는 아직 투탕카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의자 등받이의 장면은 아마르나시대의 종교적 전통에 따라 생명을 주는 아텐의 태양 아래있는 국왕 부부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 쓰인 왕의 이름은 후에 '아멘'이 붙어 투탕카멘으로 수정됐다. 그림에서 투탕카멘은 편안한 자세로 기대어 쉬고 있고 , 그의 아내  안케세나멘은 옆에서 남편의 어깨에 향유를 발라주고 있다. 

나무 발 받침대는 푸른 파이앙스로 상감처리 되어 있다. 받침대에는 세 명의 누비아인과 다른 세 명의 근동 지방 사람들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파라오의 발밑에 굴복한 이국의 우두머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 

퍼온 사진 ↓ 

 

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투탕카멘의 흉상-이 조각상의 얼굴 표정은 확실히 투탕카멘을 닮았다. 이 조각상은 팔이나 다리가 없는 토르소 형태로서 기능이 명확하지 않다. 하워드 카터와 돌료들은 이 물건이 마네킹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옷이나 보석 장신구를 착용해보거나 보관 하는데 사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몸체에 남아있는 표시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 하지만 이 토르소가알려지지 않은 의식상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뱀 모양의 휘장을 한 왕관은 뒷 부분이 없어지고 노란 색상이 특이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하이집트의 붉은색 왕관을 연상케 한다.   ↓

 

국립과천과학관 (2011.12.23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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