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궁(四沘宮)

 

우리나라 삼국시대 중 왕궁의 모습을 최초로 재현한 사비궁은 백제문화의 절정을 이룬 사비시대의 왕궁으로 궁궐의 기본배치형식 중 중앙부분인 치조(治朝)의 권역을 재현하였으며 건축양식은 하양 주심포양식으로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백제의 대표적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1994년부터 2010년 까지의 총 17년간의 역사적인 대장정 끝에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함정리 일원 3,276천에 6,904억원을 투자하여 백제왕궁인 사비궁과 대표적 사찰인 능사, 계층별 주거문화를 보여주는 생활문화마을 , 개국 초기 궁성인 위래성, 묘제를 보여주고 있다. 고분공원, 충청도민의 기증으로 조성된 백제숲,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백제역사문화관 등 1,400년 전 문화대국이었던 백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양문을 들어서면 사비궁의 전경이 보이고 우측으로 능사가 보인다.

 

궁궐의 가장 중심 공간인 정전의 출입문으로 천정전의 남문을 뜻하여 천정문이라 하였다.

 

 

 

 

 

 

 

 

 

 

 

국가의 큰 정사를 하늘에 고하여 결정한 정사암에서 유래한 천정대에서 이름을 따왔다. 천정전은 사비궁의 가장 중심공간으로 왕의 즉위 의례 신년행사를 비롯한 각종 국가의식이 거행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등 왕궁 내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대례복

 

옥좌

 

대신들과 정사를 논하던 회의장  ↑↓

 

 

 

 

 

 

 

다섯가지 색을 사용한 단청  ↑↓

백제 시대 부여의 궁성.

 

사비성은 백제 때 도읍 자체의 명칭이기도 한다. 백제 때에는 부여 일대의 평야를 사비원(泗沘原)이라 하고, 금강을 사비하(泗沘河)라고도 하였다. 백제가 협소한 웅진(熊津)을 버리고 넓은 들이 있는 곳에 보다 큰 도읍을 건설하기 위해 천도한 것은 538년(성왕 16) 봄이다. 무왕은 수도의 건설을 위하여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공장(工匠)ㆍ화사(畫師) 등을 청하였다. 사비성은 이때 새로 쌓은 것이 아니고 수축만 하였다.

 

이 성은 부소산을 감싸고 있고 양쪽 머리가 낮게 둘러져 백마강을 향해 초승달의 형태를 보이고 있어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성터의 길이가 13,000여척이나 되며, 치소가 성 안에 있었다고 한다.

백제가 망한 뒤 백제의 유민들이 모여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664년(문무왕 4)에는 한때 사비성을 점령하여 신라군을 물리치기까지 했다. 당나라가 사비성을 점령한 뒤 이곳에 동명주도독부(東明州都督府)를 설치하였으며, 웅진ㆍ노신(鹵辛)ㆍ구지(久遲)ㆍ부림(富林)의 4개 현을 예속시켰다.

 

신라가 이곳을 차지한 뒤 사비주(泗沘州, 또는 所夫里州)를 설치하였고(문무왕 11), 신문왕 때 군으로 바꾸었다. 경덕왕 때 부여군(扶餘郡)으로 바꾸어 웅주(熊州: 지금의 공주시) 관할하에 두었고, 석산(石山)ㆍ열성(悅城)의 두 현을 예속시켰다. 부여의 명칭은 성왕이 이곳으로 천도할 때 남부여(南扶餘)라고 한 데서 유래된다. 고려 이후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사비의 지명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소부리(所夫里)가 ‘’로 서야벌(徐耶伐)과 같은 뜻의 ‘동경(東京)’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설과, 사비(泗沘)가 소(所)와 같은 어형이고 부리(夫里)가 읍(邑)을 뜻하는 것으로 ‘수읍(首邑)’의 의미를 갖는다는 설이 있다. 지리적 위치로 볼 때 부여가 동경이 되기는 어려우므로 후자의 설이 타당한 것으로 본다.

 

백제문화단지 (2012.7.24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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