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장식-프라하 발라디움백화점

 

프라하 구시가지 시민회관 맞은편에 200 Shops이 있는 큰 팔라디움백화점이 있다. 현대식 시설로 규모도 큰 편이다. 이곳 남자 화장실 소변기앞 벽면의 사진들이 인상적이다. 소변기마다 앞면에 각기 다른 묘한 표정의 익살스런 여자 사진이 실물사이즈로 바로 내려다 보고 있어 처음엔 어리둥절 하기도 했으나 익살스럽고 위트가 느껴졌다. 여자 화장실에 남자의 사진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지만 확인 할 수가 없었다.  

 

 

 

 

 정면에서 내려다 보는 익살스러운 다양한 모습의 사진들 이다.

첵코 프라하 팔라디움백화점 (2013.8.1  맑음)

프라하의 구시가 광장-첵코

 

프라하 구시가 광장은 블타바 강 오른쪽 오래된 구시가의 중심에 위치한 광장이다. 11세기 형성된 이래 오늘날까지 광장으로 쓰고 있다.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공화국 몰락 선언, 1968년 프라하의 봄, 1989년 벨벳 혁명이 모두 이곳에서 시작됐다. 이곳에서는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건물 등 시대별로 예술 사조의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틴 성당, 구시청사, 천문시계, 얀 후스 동상 등 다양한

볼거리가 구시가 광장 주변에 있다."

 

첵코 특산품인 보헤미아 크리스탈 진열품 

 

 

발맛사지 집의 풍경 

 

광장 주변의 노천 카페 

 

많은 관광객이 모이는 광장  주변  ↑↓ 

 

 

전통악기로 광장에서 음악연주를 하는 사람들 

 

 

 

 

 

음악연주를 배경으로 사진 찰영하는 관광객 

 

자동차는 다니지 않지만 관광객을 상대로 마차는 운행이 되고 있다. 

 

골즈 킨스키 궁전 

 

 

얀 후스 동상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보다 100년 앞서 전개된 얀 후스(Jan Hus)의 종교개혁 운동은 체코의 민족주의 이념과 결부되어 체코 전 민족의 순교자로 숭앙 받고 있다. 특히 체코는 얀 후스가 순교한 날인 7월6일을 기념하여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얀 후스 동상은 얀 후스의 처형 500주년이 되는 해인 1915년에 세워졌으며, 조각가 라디슬라프 샬로운(Ladislav Saloun)이 세운 동상의 태좌에는 “진실을 사랑하고,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지켜라”는 얀 후스의 유언이 새겨져 있다.

얀 후스는 1370년경 보헤미아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402년 프라하 카렐대학교(Univerzita Karlova v Praze, Charles University) 총장이 되었다. 가톨릭교회의 세속화 및 면죄부 발행 등을 비판하여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했으며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Council of Konstanz)에서 종교재판을 받아 화형에 처해졌다. 

 

 

프란츠 카프카의 생가임을 알리는 동판  ↓

 

 

체코 프라하 구시가지 (2013.8.1  맑음)

스트라호프 수도원(Strahovsky Klaster)-첵코 프라하

프라하 구시가지의 블타바강(江) 맞은편 페트르진 언덕에 있는 스트라호프 수도원으로 가기위해 전차를 탔다.

 

프라하 구시가지의 블타바강(江) 맞은편 페트르진 언덕에 있는 프라하성에서 서쪽으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스트라호프 광장의 남쪽에 위치한다. 플라디슬라프 2세 때인 1140년에 건립되었으나, 그 뒤 전쟁과 화재 등으로 인해 소실되거나 파괴되어 본래의 모습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지금의 건물은 17~18세기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따라서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건축 양식이 혼합된 복합 건축 양식을 띠고 있다.

 스트라호프 수도원 안내판 

 

  

 

 

 

 

 

 

1783년 수도원 해체령이 내렸을 때는 학자들의 연구기관으로 지정되어 해를 면하였고, 이후 수도승들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 박물관은 1951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폐쇄되었다가, 1953년 체코 국립문학박물관으로 바뀌었고, 1989년 사회주의 정권이 물러나면서 다시 수도원 기능을 회복하였다. 현재는 문학박물관이자 수도원으로서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수도원 내에는 125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초기 고딕 양식으로 재건된 뒤, 17세기에 다시 바로크 양식이 가미된 성모마리아승천교회(성모교회)와 바로크 양식의 강당이 있다. 문학박물관에는 총 14만 권에 달하는 장서가 있는데, 종류에 따라 '철학의 방', '신학의 방' 등 2개의 고전 도서관과 고전주의  이후의 도서를 모아 놓은 근대 도서관으로 구분해 놓았다. 도서관은 일반에게도 개방되고 있다.

철학의 방 

 

 

 

신학의 방 

 

 

 

 

 

 

 

 

 

 

 

 

페트르진 언덕에서 본 프라하 전경 

 

 

 

 

 

첵코 프라하 스트라호프 수도원 (2013.8.3  맑음)
 

성 니콜라스 성당(Kostel Sv. Mikulase)-프라하

 

프라하 구시가지 말라 스트라나지구에 있다. 1278년에 건설되었으나 화재로 불 타 없어진 것을 1704년부터 1755년에 걸쳐 다시 지었다.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로, 건축가인 산티니(G.Santini)·디엔젠호퍼(K.I.Dienzenhofer)·루라고(A.Lurago) 등이 참여하였다. 첨탑(종탑)의 높이는 80m이다.

본당 천장에는 어린이들의 수호성인인 성니콜라스(산타클로스)를 찬양하는 1,500㎡에 달하는 대형 프레스코화가 있는데, 유럽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성당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성당 명칭은 여기서 유래하였다. 루라고가 1755년 완성한 종탑은 1891년까지 전망대로 쓰이다 이후 원래의 기능을 회복하였다.

모차르트가 자주 찾아 오르간 연주를 한 곳으로도 유명한데, 1791년 12월 그가 죽었을 때는 이 곳에서 추모미사가 열렸다. 지금도 모차르트가 1787년 연주한 오르간이 남아 있다. 프라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로 꼽히며, 둥근 청동 지붕과 웅장한 규모가 주위를 압도한다. 많을 때는 4,000명이 넘는 프라하 시민이 미사를 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후스파 교회로 사용되고 있다. 미사 외에 다양한 고전

음악회가 열리기도 한다.

 

 

 

 

 

 

첵코 프라하 (2013.8.1  맑음)

 

 

 

 

스타보브스케 극장(Stavovske divadlo)

 

 까를대학 건물 맞은 편에 스타보브스케 극장이 있다. 먼저 온 관광팀들이 스타보브스케 극장 앞에서 열심히 설명을 듣고 있다.

 

 

1783년 노스티스 백작이 처음으로 건립했을때 노스티스 극장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그 이후 여러번의 증축과 보수를 거듭하여 1989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되었다. 프라하에서 최초로 만든 극장으로 1787년에 모차르트가 지휘하여 '돈 조바니'를 초연한 장소로 유명하다. 극장 입구 오르편에 그 유명한 청동색의 동상이 보인다.

 

 

모차르트의 유명한 오페라 '돈 조바니'를 1787년 10월 29일 스타보브스케 극장에서 초연하여 성공한 것에 감사의 뜻으로 모차르트에게 증정하였으나 큰 동상이라 귀국시 프라하에 기증릏 하고 돌아 갔다 한다. 이 세상에는 또 하나의 유령상이  짤스부르크에 있는데 프라하의 것이 진품이라고 한다. 

 

동상의 얼굴이 없다. 

 

이 극장에서 1787년 10월 29일 모차르트의 돈 조바니의 초연을 기념하는 안나 흐르미의 작품 "Il Commendatore" 라는 패말이 붙어 있다.

 

극장 내부를 볼 기회가 없어 포스터 사진을 찰영하였다.

 

오늘 저녁에도 연주가 있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조바니의 포스터

프라하 스타보브스케 극장 (2013.8.1  맑음)

프라하 까를대학(Univerzita Karlova v Praze)

시민회관에 이어 화약탑의 팁투어가 끝나 까를대학으로 이동을 했다.  

 

 화약탑의 문을 통해 구시가지로 들어 가게된다.

 

 관광코스가 저의 비슷하게 이루어져 많은 관광팀들이 우측골목으로 해서 까를대학으로 가고 있다.

 

 까를대학 : 프라하대학교라고 불리는 중앙유럽 최초의 대학이자 유럽에서 세번째로 생긴대학으로 1348년에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오늘의 프라하를 만든 까를 4세가 설립한 대학이다.

 

 

 까를대학 앞 분수대와 석상

 

  

 

 

 첵코의 가장 오래된 최대의 대학으로 의과대학이 유명하다 한다.

 

 

  

 

 까를대학은 1348년 까를(카를) 4세가 창립한 중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본래 고딕양식으로 지었고 이후 바로크 양식으로 지었는데 소실되어 본부건물을 신축하면서 고딕의 예전모습이 남아있는 고딕의 창문하나만 건물 남측에 남겨 놓았다 한다. 이 대형 창문은

성 비트 대성당과 까를교를 설계한 '페트로 파를레슈'가 지었다 한다.

 

프라하 까를대학 (2013.8.1  맑음)

프라하 화약탑(Prague Powder Tower)

 

프라하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나뉘는 지점으로, 아르누보 양식으로 지어진 시민회관 바로 옆에 있는 중세 프라하의 성곽 출입문으로 15세기에 세워졌으나 그후 파괴된것을 네오고딕 양식으로 복원한 탑이다.


1475년 지금의 구시가지를 지키는 13개 성문 가운데 하나이자, 대포 요새로 건설되었다. 이후 총기 제작공이자 종(鐘) 주조공인 야로스(Tomas Jaros)의 거처 겸 작업실로 개축되었다가, 루돌프 2세 때인 17세기 초에 연금술사들의 화약창고 겸 연구실로 쓰이면서 화약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딕 양식의 탑으로, 높이는 65m이며, 총 186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프라하의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화려한 장식과 다양한 색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달리 어둡고 칙칙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옛날에는 왕과 여왕의 대관식을 거행하는 장소이자, 외국 사신들이 프라하성(城)으로 들어올 때 꼭 거쳐야 하는 관문으로 이용될 만큼 13개 성문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60년대부터는 연금술이나 종 주조와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화약탑과 나란히 있는 길이 신시가지, 탑을 지나 서쪽 길이 구시가지가 각각 시작되는 곳이다.

 위사진의 화약탑 문을 통해 구시가지로 들어가게 된다.

 

 

 

 65m의 종탑에 오르면 신,구시가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소여서 많은 관광객들이 올라가 보는 곳이다.

 

 

 40여명이 넘는 팁투어 참가자들이 이재인씨의 명쾌한 설명을 경청하고 있다.  

 화약탑 안내와 소개가 끝이나 문을 지나 구시가지에 있는 다음장소로 이동을 했다.

화약탑이 검고 칙칙하게 보이는 것은 건축재로 사용된 사암이 시간이 지나며 산화되어 검은 색으로 변해서 이다. 동구의 많은 건물들이 사암으로 건축이 되어 여러나라에서 어두운색의 성이나 건물을 보는 수가 흔한 이유의 하나이다.   

 

첵코 프라하 화약탑 (2013.8.1  맑음)

프라하 시민회관(Obecni Dum)

 

오전 9시반에 시작되는 프라하 팁투어에 참가하기 위해 일직 호텔을 나와 모이는 장소로 향했다. 이른 아침이라 거리는 한산했고 아침 햇빛에 밝은 색의 건물들이 산듯하게 눈에 들어 온다.  

 

오늘따라 거리가 한가해서인지 스냅사진을 담으라 요구가 잤다.

 

전차와 지하철을 이용해 근처의 역에서 조금 걸으면 시민회관에 이른다.

 

왼쪽의 검은색의 화약탑과 붙여 지어진 밝은색의 프라하의 상징인 시민회관 이 보인다.

시민회관 입구

연주회장과 전시장, 레스토랑 등을 포함하여 500여 실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복합 문화시설이다. 보헤미아 왕조의 궁궐이었던 기존의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1905년부터 1911년에 걸쳐 프라하를 상징하는 현재의 건물을 신축하였다. 건축 당시 알폰스 무하, 카렐 슈필라, 얀 프라이슬러 등의 체코 미술가들이 참여하여 외관은 네오바로크 풍으로, 내부는 아르누보 양식의 내부 인테리어를 완성하였다. 

 

건물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장소는 체코의 음악축제 ‘프라하의 봄’의 개막과 폐막 공연장으로 유명한 스메타나 홀이. 축제의 첫날인 매년 5월 12일 저녁,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의 연주와 함께 개막 공연이 시작된다. 1918년 10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이 선포된 장소이기도 한 이곳은 현재 프라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주무대로 이용되며, 음악회 외에도 연극, 발레, 오페라 등을 공연하고 있다.

아르 누보(Art Nouveau)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서유럽 전역 및 미국에까지 넓게 퍼졌던 장식적 양식. 아르 누보라는 명칭은 1895년 파리에서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1863~1957)가 내부 장식한 빙Siegfried Bing의 공예품점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같은 양식을 지칭하는 말로 모던 스타일(Modern style, 영), 유겐트슈틸(Jugendstil, 독, 오), 스틸레 리바티(Stile Liberty, 이), 귀마르 양식(Guimard Style, 프) 등 나라마다 다양하다. 아르 누보의 탄생은 유럽의 전통적 예술에 반발하는 당시 미술계의 풍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중세적인 수공예 정신의 복귀를 선언했던 모리스William Morris(1834~1896)의 미술과 공예운동, 빅토리아 시대의 인습에 반항하고 초기 르네상스의 우아함과 색채를 재생하려 했던 라파엘전파, 아카데미에 순응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신비하고 계시적인 태도로 작업했던 블레이크William Blake(1757~1827) 등이 그 기원이다.

19세기 후반에 유행처럼 번졌던 아카데믹하고 절충주의적인 ‘역사주의’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아르 누보 운동은 과거의 전통 양식들을 모방하거나 변형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하나의 새로운 양식을 창출하고자 했다. 종래의 건축이나 공예가 그 전형을 그리스, 로마 혹은 고딕으로부터 구한 것에 비해 아르 누보 작가들은 모든 역사적인 양식을 부정하고 자연에서 모티브를 빌려 새로운 표현을 얻고자 했다. 특히 덩굴손이나 담쟁이 등 식물의 형태를 연상케 하는 유연하고 유동적인 선과 판상, 당초, 화염 형태 등 특이한 장식성과 유기적인 움직임이 있는 모티브를 즐겨 사용했으며, 고전적인 좌우대칭이나 엄격한 구성은 배제하였다. 아르 누보 양식은 당시 상징주의와 나비파, 뭉크Edvard Munch(1851~1944), 툴루즈-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 등의 미술과도 관련이 있다. 이러한 형태의 선호로 인해 견고한 구축성이나 기능을 다소 소홀히 하는 형식주의적이고 탐미적인 장식으로 빠질 위험이 있었으며 이는 아르 누보가 비교적 단명한 이유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세계미술용어사전>

프라하 시민회관의 정면 위에 Kanel spillar의 모자이크벽화인 '프라하에의 경의'가 있고 그 벽화 테두리에 금색빛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프라하여 그대에게 영광 있으라!

시대의 악의에 저항하며

그대가 수세기에 걸쳐서

모든 폭풍에 참아 온것같이

 

 

 

 

프라하를 찾는 수 많은 여행객과 여행팀들이 이곳에서 모여 관광을 시작해 아침부터 사람들이 몰리고 하루 종일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프라하 팁투어는 명소를 따라 걸으며 그곳에 대한 상세한 설명만을 해주어 입장을 하거나 그 내부를 보기위해서는 개인별로 선별해 관람을

적절한 시간에 다시해야 했다.

 

프라하 시민회관 (2013.8.1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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