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구

 

과천경마장에서 전통마상무예의 하나인 격구를 재현하여 말경주 중간에 실연을 하여 관람객으로부터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2006.5.21)

한팀 4명으로 8명이 경기를 한다.

채로 공을 집어 드는 모습

 

 

 

골대를 향해 휘두르며 달리다 공을 골대로 던저 슛하는 모습

공을 집어 올려 달리는 모습

 

공을 들어 휘두르며 달려나가는 모습

 

 

 

말을 타고 달리면서 숟가락 모양의 채로 공을 쳐서 상대방 문에 넣는 경기.

타구(打球)·포구(抛毬)라고도 한다. 격구는 BC 500년에 페르시아에서 행한 기록이 있다. 이후 티베트·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에 전해졌다.  19세기 중반 영국인이  인도에서 이

경기를 보고, 규칙을 개정하여 만든 경기가 폴로(polo)이다. 채의 길이는 1m, 공은 나무를 둥글게 깎아 붉은 옻을 입힌 것으로 수놓은 비단으로 싸기도 한다. 경기방식에는 3가지가 있다. 첫째는 구문(球門)을 경기장 양쪽에 세우고 양편에서 서로 공을 마주 쳐 넘기는 방법이다. 둘째는 문을 하나만 세우는 방법이다. 2개의 기둥 사이의 윗부분 가운데 구멍을 뚫은 널판지를 가로지르고, 아래에는 그물을 쳐서 이 구멍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공은 그물에 걸려 되돌아 나온다. 공이 구멍을 빠져나갈 때마다 1점을 얻는다. 셋째는 경기장 한 끝에 문을 세우고 다른 한쪽 끝에서 출발하여 일정한 순서에 따라 공을 치면서 되돌아 나오는 방법이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에 성행했으며, 왕족들도 즐긴 경기였다. 우리나라에는 937년(고려 태조 1) 격구장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주로 단오절에 궁중행사로 시합을 열었으며, 의종 때는 여성팀도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태조와 정종이 격구를 즐겼으며, 세종은 "격구를 잘하는 사람이라야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할 수 있다"고 하여 1425년(세종 7) 무예연습의 필수과목으로 삼았다. 〈경국대전〉에는 무과의 시취과목으로 수록되었다. 중요한 군사행사 때도 격구를 시행했다. 이때 경기방식은 경기자들이 출마표(出馬表)에서 격구봉을 들고 기다리고 있다가, 기녀(妓女)가 노래하고 춤추면서 구장 한복판으로 공을 던지면 양쪽 경기자들이 달려들어 공을 구문 밖으로 쳐내는데, 공을 밖으로 쳐낸 횟수가 많은 편이 이긴다. 말을 타지 않고 하는 격구도 있었는데, 민간에서 유행한 장치기는 격구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중기 이후 격구는 쇠퇴했다. 정조는 격구를 이십사반 무예의 하나로 선정하여 〈무예도보통지 武藝圖譜通志〉를 만들면서 격구보를 수록했다. 그러나 당시 이를 위해 격구법을 잘 아는 자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고 한다.

 

과천경마장에서 (2006.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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