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인정전(昌德宮 仁政殿)
태종 이방원이 거처할 이궁(離宮)으로 창덕궁을 건립하면서 1405년에 완공되었다. 태종 때에는 정면 3칸의 작은 전각이었으나 1418년에 규모가 큰 건물로 고쳐지었다. 인정전(仁政殿)은 인자한 정치를 펼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창덕궁의 정전(政殿)으로서 면모를 갖추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재로 전소되었고 선조 때 복구공사가 시작되어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던 1607년에 다시 건립되었다. 이후 인정전은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정무를 행하였고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건물이 되었다. 하지만 창덕궁은 여러차례 화재로 시달렸는데 1803년 선정전에서 불이나 인정전까지 전소되고 말았다. 이듬해 1804년(순조 4) 다시 건립되었다. 인정전의 앞 마당에는 박석(薄石)을 깔았고 품계석을 설치하여 조선왕조의 법전으로 역할했다. 건물의 방향은 남향이고 인정문과 함께 회랑으로 둘러싸여 일곽을 형성한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重層) 팔작지붕 다포(多包)집이며 순조 때 용마루에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배꽃문양 다섯개를 새겼다. 기단(基壇)은 2중으로 되어 있으며, 중앙과 좌우 측면에 석계(石階)를 설치하고 바닥면에는 전석(塼石)을 깔았다. 상하층으로 된 기단은 장대석(長臺石)으로 쌓았고 상하층 월대에는 돌계단을 설치하였다. 돌계단 난간에는 8마리의 석수(石獸)를 새겼고, 가운데 계단에는 답도(踏道)를 설치하여 봉황을 새겼다.
기둥은 배흘림이 없는 원주(圓柱)이고, 내부에는 10개의 높은 기둥과 4개의 우고주(隅高柱)를 세워 중층가구법(重層架構法)을 따랐다. 두공(枓栱)은 밖이 3출목(三出目)이고 안이 4출목인 다출목으로 전개되었으며, 기둥머리의 안초공(按草工)으로부터 살미와 첨차(檐 遮)의 세부수법이 조선 말기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가구(架構)는 외중층(外重層) 내통층(內通層) 수법이고, 고주(高柱) 몸에 퇴량(退樑)을 끼워서 2층평주(二層平柱)를 받게 하였으며 우고주(隅高柱)가 2층 우주가 되게 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인데 각 마루에는 양성(兩城)하여 취두(鷲頭) ·용두(龍頭) ·잡상(雜像)을 올려 놓았고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끼웠다. 이 건물은 가구의 짜임새와 외관이 견실하면서 운치와 미려를 겸하여 흥선대원군이 근정전(勤政殿)을 재건할 때 이 건물을 규범으로 하였다.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화재로 소실된 후에는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정치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인정전은 창덕궁에서 가장 권위 있는 건물로, 왕의 즉위식과 신하들의 하례 및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주요한 국가적 의식이 치러졌다.
돈화문 ↓
진선문 ↓
진선문에서 본 인정문 ↓
인정전 ↓
인정전 뜰의 품계석 ↓
봉황 문양 ↓
옥좌 ↓
창덕궁 인정전 (2013.11.28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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